부석사를 찾다.(2013. 8. 1)
영주관광 세 번째는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부석사이다.
입구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 늦었지만 맛집으로 이름이 올라있는 “부석사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맛있게 민생고를 해결하고 느긋하게 부석사를 방문하였다.
주차장에서 부석사까지는 약 500m의 거리가 있는데 은행나무숲길이 멋있고 아름답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더욱 아름답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유명했던 무량수전을 가까이서 보니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지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은 안동의 봉정사라고 한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희방사 참배 후 소수서원을 구경하고 부석사에 도착했다.
다음 관광지는 수도리전통마을(무섬)이다.
입구에서 부석사로 가는 은행나무숲길
이곳에는 봉황산부석사라 씌여 있다.
부석사의 배경이 되는 뒷 산이 봉황산인데
입구에 들어서면 일주문(?)에는 더 큰 줄기의 산을 인용해 태백산부석사라 씌여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부석사(浮石寺)의 본전(本殿)으로서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그후 몇 번의 중창(重創)이 있었고, 조선 광해군(光海君:1608∼1623) 때 단청(丹靑)을 하였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부석사삼층석탑
선비화
부석사(浮石寺)의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추녀 밑에 일명 선비화(禪扉花)라고 불리는
콩과 낙엽관목인 골담초 1그루가 있다.
<택리지>에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나무가 바로 선비화라 한다.
부석
부석사에 깃든 전설
부석사에는 의상대사와 당나라 처녀 선묘간의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의상은 699년 불법을 닦으러 중국에 도착해 어느 불교신도 집 에서 묵었는데 선묘는 그 집의 딸이었다.
사랑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의상이 불법 정진을 위해 선묘를 멀리하면서 헤어지게 됐다.
의상을 흠모하던 처녀는 의상이 공부를 마치고 10년 후 신라로 건너 갈 때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려 했으나
배가 이미 떠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상이 떠나자 처녀는 자신이 용이 되어 의상의 귀향길을 돕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다른 종파의 반발로 부석사를 못 짓자 커다란 바위로 변해
이들을 위협해 내 쫓음으로써 의상이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부석사의 부석(浮石)은 바위로 변한 선묘가 땅 위에 내려앉았다는 데서 연유했고,
무량수전 왼쪽의 커다란 바위가 바로 선묘가 변한 바위라고 한다.
자인당에 보존된 삼존석불(석가여래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