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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풍경

표충비각과 홍제사를 찾아서..

차디찬 바람이 온 몸을 압박하는 일요일 아침 밀양 무안면소재지에 위치한 표충비각과 홍제사를 찾았다.

경주최가 사성공파 후손(32~33대손)들이 조상님(8대조~4대조)을 찾아 시사(묘사)를 지내는 장소가 무안면 신숲 하서산자락에서 시작하기에 모임시간보다 약 3~40분 먼저 도착해 유명한 표충비각과 홍제사를 찾은 것이다.

 

 

 

 

잘 알다시피 표충비는 눈물을 흘리는 비로 유명한데, 표충비각은 함께 있던 표충서원이 표충사로 이전된 후 덩그러니 남은 표충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비각이다.

 

비석이 땀을 흘린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것도 땀 흘리는 시점이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라고 하니 이 비에 대해 더 큰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나라에 큰일이란 가령 1894년 갑오농민전쟁, 1910년 한일합방, 1919 3·1만세운동, 1945년 광복, 1948년 이승만 대통령 취임, 1950년 한국전쟁 등의 사건이다.

        

 

 

 

 

 이곳 무안에 표충비가 세워진 것은 영조 18(1742)으로, 무안면이 사명대사의 출생지라는 인연 때문이다. 사명대사는 왕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1년 동안 묘향산에 머물렀다가 고향인 밀양 영축산 동쪽 기슭(지금의 무안면 중산리)에 백하암(白霞庵)이란 자그마한 암자를 지어 지낸 적이 있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뒤 백하암에 표충사(表忠祠)라는 사당을 지어 사명대사를 제향하였는데, 병자호란 후 사당이 퇴락하자 숙종 36(1710) 밀양부사 김창석이 나서서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짓는 등 규모를 넓히는 일을 벌였다. 이에 사명대사의 법을 이은 5대 제자 남붕대사(南鵬大師)가 나서서 나라로부터 표충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 한편으로 사당 어귀인 현재의 자리에 비를 세운 것이다.

 

 

 

 

 

 

 

 

 

 

표충비각 안에 있는 표충비는 삼비’(三碑)라고도 불렸는데, 그것은 비석에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내용이란, 비석의 정면에 씌어 있는 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 사명대사의 행적과 임진왜란 때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뒷면의 西山大師碑銘’(서산대사비명, 서산대사의 공덕과 기허대사1)의 사적을 적고 있다), 측면의 表忠祠事蹟記’(표충사사적기, 표충사의 사적을 담고 있다)가 그것이다.

 

 

 

 

 

 

 

 

 

 

 

 

 

 

 

 

 

 

 

 

 

 

 

 

 

 

 

 

 

 

 

 

 

 

 

 

 

 

 

 

 

 

 

 

 

 

 

 

 

 

 

 

 

 

홍제사는 조선시대 승병장인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당 수호사찰이다.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에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 선 사명대사의 비가 이곳에 자리한 것은 무안지방이 그의 탄생지라는 인연 때문이다. 원래 서산·사명·기허대사의 진영을 모신 표충사당이 있었으나 18세기 후반 재약산으로 옮겨져, 현재 삼비문(三卑門) 안에는 1742년에 조성된 표충비와 향나무, 비각 수호사찰인 홍제사만이 남게 되었다.

 

홍제사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뒤 백하암에 세웠던 표충사(表忠祠)의 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