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풍경이 있는 여행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일시 : 2022.12.09.(금요일)

날씨 : 흐림

위치 : 서구 아미동 산22번지 일대

 

아미동 비석마을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로, 산자의 집과 죽은 자의 묘지가 공존하는 주택을 탐방하기 위해 충무동로터리에서 아미동으로 가는 마을버스 서구2번을 타고 아미골공용주차장으로 이동했다. 과거와 공존하는 특이한 동네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탄생한 마을로 생각하면 되겠다.

 

 

부산시 등록문화재 제1호로 유일하게 당시 묘지위 집이 보존되어 있는 현장이다. 더 상하지 않게 보강 작업을 해놨는데, 공동묘지의 비석을 이용해 기초를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윗부분을 찍은 것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아미골공용주차장에 내려 찬찬히 마을을 구경한다. 이곳에 내리면 먼저 추억의 이야기 거리를 만든 카페거리인데, 담장을 장식한 안내판으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골목 갤러리이다.

 

 

 

 

기찻집 예술체험장 겉의 모습이다. 과거를 소환하는 추억이 새록한 느낌을 받는다. 주차된 차로 인해 외관 구경도 깨끗이 할 수가 없어 아쉽긴 하다. 위드 아미맘스 아미역으로 꾸며져 있다.

 

 

 

 

주택의 벽면을 장식하니 보기도 훨 좋다. 벽면에 붙은 장식품과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도 한다.

 

 

 

 

1960년대 부터 80년대 까지의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진들도 담겨 있다.

 

 

 

 

비석문화마을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이곳은 아니지만 아미동에서 얼마간 기거한 적이 있는데, 이 조형물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예쁘게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이곳 역시 빈 공간만 있으면 주차장이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오르다보면 비석마을의 내부를 다 들여다 볼 수 있다. 아미비석문화마을 안내센터가 있어 들어가보려니 문이 잠겨 있다. 안내 팜플렛이라도 챙기고 싶었는데, 

누구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부산의 역사를 좀 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네가 바로 이곳이라 생각된다. 일본인들이 광복 당시 공동묘지를 남겨두고 떠난 후 5년간 비어 있다가, 6.25 전쟁 당시 전국에서 온 피난민들로 부산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부산 중심부에 더 이상 집 지을 자리가 부족하여 피난민들이 영 꺼림직해도 궁여지책으로 비어있는 묘지 땅에 집을 짓고 마을을 꾸렸던 곳이다.

 

 

 

 

밋밋한 벽을 벽화와 함께 장식해 놓으니 마을이 훨씬 밝은 것 같다.

 

 

 

 

아미동 산상교회 앞에 묘지위 집인 옛 가옥이 보존되어 있다. 안내판을 자세히 보면서 찬찬히 하나하나 찾아 보기로 한다.

마을버스에서 이곳 산상교회에 내리면 바로 만나지는데 그러면 추억의 카페 거리는 뒤죽박죽 봐야한다.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하늘전망대, 축대비석,수돗가 비석, 놀이터 계단비석, 가스통 밑 비석, 묘지위 집 등이 표시되어 있다.  참고로 지금 이곳이 무담위의 집이 있는 곳이다.

 

 

 

 

피란생활박물관 앞의 골목길 모습이다. 벽화와 밝은 색의 페인팅으로 마을은 밝지만 골목은 엄청 좁음을 알 수 있다.

검색을 해보니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인 공동묘지 터라 도시괴담 등을 모아놓는 사이트에 관련 괴담이 자주 보인다. 묘비였던 돌을 주워와 다듬이질할 때 썼더니 "이타이, 이타이(아야, 아야)!" 하는 소리가 돌에서 들렸다는 얘기, 유골함이었던 단지를 항아리로 쓰려고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아츠이, 아츠이(뜨거워, 뜨거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거나 안에서 손이 나왔다거나, 세탁소 지하에서 밤중에 자는데 게다 소리가 들리더라, 기모노를 입은 귀신을 봤다 등등

 

 

 

 

골목이 치안올레길이란다.

 

 

 

 

피란생활박물관 내부의 모습이다. 제봉틀이 눈에 확 들어 온다.

 

 

 

 

구름이 쉬어 가는 전망대로 가는 입구의 벽면이다.

 

 

 

 

하늘전망대에 도착했다. 도깨비가 귀신들을 못오게 지키는 느낌을 받는다. 곳곳에 할머니들 서너명이 모여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가까이 가 이것 저것 몇가지를 물어 봤다. 지금 이동네는 옛집은 그의 없고 비석들도 집수리 하면서 많이 없어지고 특히 위에 페인트 칠을 해 많이 안보인단다. 할머니 한분은 우리집도 밖에 페인트칠을 해 잘 안보인다고 하신다.

 

 

 

 

구름이 쉬어 가는 전망대로 표시하기도 한 하늘전망대에서 본 부산시내의 일부분이다. 높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건축자재로 이용된 흔적을 볼 수 있다. 아래 설명을 읽어 보면 감천고개에서 산상교회로 이어지는 주변이 아미동 산19번지 일대라고 하는데, 부산역으로 몰린 피난민을 그때 공무원들이 이 주소를 쓰주며 보낸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피난민들의 뭄막으로 채워져 나간 공동묘지가 지금의 주택지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피란수도 흔적길 등 여러 테마의 작품들이 도로를 따라 만들어져 있다.

 

 

 

 

옛 무덤 위 집 바로 위 건물이 비석사진관이 만들어져 있다. 바로 옆이 이발관이다. 겉에서만 쳐다 본다.

 

 

 

 

가스통이며 쓰레를 놓을 수 있는 발판으로 사용되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화분을 올려 놓은 비석도 있다. 이집 주인집에 할머니 세분이 비좁게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는데, 내가 이것 저것 물어 보니 주인이 나오셔서 화분을 치워주시며 사진을 찍어가란다. 너무 마음이 고마웠다.곳곳에 할머니들께서 모여 이야기하며 지내는 걸 보니 역시 마을공동체며 어울리는 마을주민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도시재생사업으로 커뮤니티 시설이 건립되고, 마을공동체가 활발히 운영되면서 도시 미래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움트고 있습니다」 라고 벽화 옆에 쓰여 있다.

 

 

 

 

또 다른 피란생활박물관을 들여다 보니 비석문화마을이 만들어진 사유를 설명 해놨고 묘석과 묘탑을 소개해놨다. 

겸색해서 관련되는 자료를 옮겨본다.

피란 오면서 여기에 터전을 잡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당장 굶어죽거나 얼어 죽을 지경이었기에 처음에 이곳에 올 때도, 그리고 지금도 무덤이든 비석이든 귀신이든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배고픔과 추위라서 누울 자리를 가릴 처지도 아니었고 귀신 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것.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도 익숙해지니까 역시나 무서울 건 없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위에 산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거처를 내어준 데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들어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비석 앞에 수시로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 놓고 영혼을 위로해주며, 명절에도 제사(차례)를 같이 지내준다고 한다.

 

음력 715(백중)에는 인근 절에서 단체로 일본인 위령제를 지낸다. 아무리 적국 사람이었다고 해도 살아있는 일본인은 광복과 함께 모두 쫓겨나 여기 묻힌 사람들은 모두 제사도 끊겨버린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었고, 지배층도 아니고 대부분 서민으로 힘들게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동병상련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감천고개에서 대티터널로 가면 까치고개가 있는데, 까치고개 지명 유래를 살펴보니 과거 이곳에 일본인들의 화장장이 설치되어 있을 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망인을 위해 음식을 놓고 위령제를 올리고 나서 그것을 주변에 두고 가니 이 음식들을 먹기 위해 까치들이 많이 몰려와 살아서 까치고개라고 한다고 한다.

 

 

 

 

축대와 계단으로 이용된 비석들을 모아봤다.

 

 

 

 

아미농악발원지도 있다.

 

 

 

 

아미골 공용주차장에서 나름 찬찬히 비석문화마을을 둘러 봤다. 골목이 굉장히 좁아 삶에 큰 불편을 격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역사의 교훈도 세겨야하겠고, 지금 사는 주민들의 문화 생활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래 사진의 안내판은 감천문화마을 입구에 서있는 것이다. 고개에 오르면 길 건너가 감천문화마을이다.